정예화된 교회를 위한 취사선택(민 13:21-33)
1. 환골탈태(換骨奪胎)
400년 동안 애굽(이집트)에서 배부른 돼지처럼 살았던 노예근성이 어찌 단번에 바뀔 수 있겠는가! 히브리 노예들은 애굽이라는 '제국의 이야기' 속에 강제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한 출애굽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따라 사는 새로운 부르심이었다. 본격적인 광야의 여정에서 히브리 노예들은 12지파(군대 조직화)를 편성했다. 민수기는 연단과 성화를 위한 훈련의 신학(제자도)이다.
광야의 여정 곳곳에서 영적 매진(진군)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불평과 반역이 계속 되었다. 애굽에서 노예근성으로 길들여졌고 마음과 몸에 물든 무지와 어리석음은 ‘보는 행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몰이해, 막무가내의 반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성찰의 결여, 그리고 불신앙과 불순종의 누룩이 온덩어리에 독버섯처럼 넓게 퍼져갔다.
'애굽의 시간'과 단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광야의 시간'으로 탈바꿈해야 했다.
2. 반역은 영적 퇴행 행위
징계와 정화의 심판을 자주 겪으면서도 방황과 퇴행을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다.
백성들은 출애굽과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모세가 야심에 물들어 자기가 왕이 되려는 프로젝트라고 곡해했다.
그래서 불순종과 불신앙의 눈으로 정탐을 하면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하다’는 합리적이고 겸손해 보이는 평가에 머문다.
상황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 만들기를 볼 수 없는 것도 커다란 패착이다.
반역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좌초시키려는 지점까지 이른다. 히브리 노예들은 출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대안적 새로운 사회의 마중물(첫열매) 역할로 소환(부르심) 되었다.
그렇지만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이런 복된 소식조차도 소 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다. 이들은 보이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에 하나님은 옷술과 청색끈을 실시간 달고 보게 하여 '거룩을 대표하는 하나님 백성의 기백'을 갖게 했다.
옷술과 청색끈은 눈(eye)이 지시하는대로 보고 와서 영적으로 간음하여 하나님을 배반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깊은 상기와 성찰의 표시다. 눈의 행위로 다른 것을 보는 것이 영적 간음이다.
3. 중보자적 리더십
모세의 리더십은 영적인 가치들이 훼손되고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하는 사람들(교회) 사이에 서 있다. 중재자로서 모세는 불순종과 반역이 초래할 엄중한 결과(애굽 복귀운동)를 막거나 완화하려는 애절하지만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불순종을 해소하는 길은 제사(제물 드림)와 중보기도다. 하나님과 어려워진 관계,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 사이에 서서 평화의 아침을 열고 화해의 새날을 만드는 자들이 참된 영적 리더십이다.
중보자적 리더십은 빈번하게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좌절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의 힘'도 작동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안다. 그래서 일방적이고 독보적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소망의 인내를 견지할 수 있다.
영적 리더는 자의적인 신앙(불신앙)에 경도되어 자기 욕망적 추진이 만용이자 광기적 불신앙으로 공동체에 치명상을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