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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웅 목사]왕의 폭정(暴政)과 예언자의 탄핵(왕상 21:1-29)

청신아 2023. 11. 14. 15:25

1. 욕망을 자극하는 권력 

나봇은 토지를 팔지 않겠다고 명확하게 얘기했다(3절). 토지 매매를 불허하는 신명기의 법률적인 제한 조치가 문제는 아니었다.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원하는 남편의 욕망을 달래 주며 그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법을 왜곡하여 이용한다. 

처형당한 범법자의 토지를 왕이 압류하며 착복하는 전통은 이스라엘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였다. 그러니 힘을 웬만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선용할 목적을 제외하면 힘은 인간의 부패와 맞물려서 '악의 평범성'을 드러낸다.

아합은 나봇과의 협상에 실패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거절당한 마음에 속이 상하여 최악의 침체에 빠졌다(4절). 이세벨은 7절에서 아합을 격려하는 말이나 혹은 이웃 나라처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왕이 되라고 말한다. 

이세벨은 아합의 왕권을 자극하며 '지금 당신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맞나요?' 혹은 '왕이시여, 제대로 힘을 쓰는 왕이 되길 바랍니다'라고 얘기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메시야의 힘을 쓰라고 유혹했던 것처럼, 이세벨은 모든 힘을 써서 포도원을 왕에게 주려한다. 

2. 위증(僞證)과 모살(謀殺) 

신명기의 '땅의 신학'에 의하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채소밭으로 사용하려고 한 것은 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분깃이며 상속받은 기업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였다. 땅은 함부로 양도할 수 없는 생명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봇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에게 준 포도원이 '애굽식의 채소밭'으로 바뀌는 것에 반대했다(신 11:10-12). 협상에 실패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돌아갔지만, 이세벨은 오히려 나봇의 맹세를 역이용하여 왕에게 무소불위의 왕권 행사를 종용한다(7절). 

거짓 증언을 할 두 사람을 매수한 음모의 주동자는 이세벨이다. '돌로 쳐 죽이라'는 말이 후렴구처럼 너무 반복해서 나온다(10, 13, 14, 15절).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자신들의 죄를 씻으려는 정당성 확보의 의도가 다분하다. 

이세벨은 아합을 이번 모해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것처럼 빼려고 노력하지만 연대책임에서 면할 순 없었다(19절 상). 신적 은혜와 선물로써 야웨께서 '차지하게' 해 주셨던 땅을 이제는 불법으로 '차지하려고' 한다(15절).

3. 수수방관의 죄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지도자들과 경제인들 및 유력한 조직들에게 제대로 잘 전달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깨어 자문(自問)해야 한다. 교회가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이세벨의 죄악에 공조한 '아합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교회가 현상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웃과 사회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회개하는 길은 경청이다. 경청은 몸을 기우려 눈을 맞추고 마음을 집중해서 듣는 것이다.

이세벨에 휩싸여 사달을 낸 아합은 이제 엘리야의 말씀에 휘둘려 있다. 아합이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으로 되돌려주실 것이다(20-21절). 아합은 나봇에 대한 범죄를 넘어 정의 훼손의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께 저질러진 범죄'로 단죄된다.

아합은 가짜 금식에서(4절) 진짜 금식을 한다(27절). 회복의 서광이 즉각적인 심판을 유예시킨다. 그러나 한 세대 후 아합의 피는 나봇이 죽임을 당했던 곳에서 개들에 의해 핥아졌다(22:38). 지금은 엘리야 같은 예언자적 말씀이 부재한 교회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