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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웅 목사]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욥기 10:1-22)

청신아 2023. 12. 4. 14:30

1. 나쁜 위로의 전형 

빌닷은 거칠고 노골적으로 욥의 결백확신 주장과 하나님의 까닭 없는 타격에 원통해 하는 욥의 항변에 분을 참지 못하며 정죄한다. 심지어 욥의 고난을 자녀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단정한다(8:4). 

빌닷은 욥이 재기하기를 격려하지만 엉뚱한 충고이며 그릇된 진단과 그릇된 충고 밖에 안되었다(8:6-7). 왕골과 갈대의 허무한 생장주기와 악인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연결한 다(8:11-19). 빌닷은 욥이 이제는 회개한 의인이 된 것처럼 허황된 회복의 시나리오를 말한다(8:20-22).

빌닷의 어설픈(naive) 하나님 정의변호론은 설득력도 없고 무익하며 오도된 논리였다. 욥처럼 폭망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볼 때 반드시 숨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거나 '짝퉁' 경건처럼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온 자의 최후라고 말한다. 

참으로 빌닷은 2차 가해자와 유사한 언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위로한답시고 고문하는 빌닷의 몰인정과 무자비를 보며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책과 전통 속에서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묘막측한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잘 모를 수 있다. 

2. 의로운 고난자들의 원형 

욥은 9-10장에서 빌닷의 공격에 응수하며 하나님과도 제대로 대화를 하고자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욥은 일관되게 현재의 고난을 자신의 악행과 허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세와 권선징악의 통치 앞에 탄식과 경탄할 수밖에 없다(9:8-16). 욥은 자기학대적 한탄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경멸할 정도로 버겁고 처참하다고 토로한다(9:20-22). 세상을 이처럼 거꾸로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 때문에 절망한다(9:24).

욥의 세계관은 극도로 비관적인 ‘악 지배론’이다. 세상이 이미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비참하고 부조리한 뉴스를 보노라면 이 세상은 힘 없는 자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도 하나님은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욥기는 정의가 박탈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고난을 당한 모든 사람이 '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하나님은 의로운 대의명분을 위해 해를 입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항변과 탄식에 회신을 하셔야 한다.

욥의 사회비평적 안목은 계속 날카롭고 점점 더 커지고 있다(24장을 보라). 세상에서 억울한 고난자들에 대한 공명과 체휼이 깊어지고 있다.

3. 격통으로 몸서리치는 사람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억울하고 원통하다고 말한다. 어째서 생명과 은혜를 주신 분이 지금은 이 모든 것을 거둬 가는지 질문한다(10:1-12). 

욥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격의 결과로 보며 항변한다. 자신이 분명히 의롭지만 자기가 당한 재앙으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말한다(10:15). 욥의 친구들이 가한 독설과 단죄 및 자백 강요를 군대의 공격처럼 느낀다(10:17).

욥은 삶이 끝나면 저생에 내세가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10:21-22). 욥은 하나님의 일방적 타격(폭행)으로 무너졌고 이생이 끝나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그러니 내세나 부활을 믿으며 억울한 자신의 인생을 참을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현세적 세계관을 가진 욥에게 지금 여기서 증명되지 않는 정의는 진짜 정의는 아닌게다. 몸의 부활을 믿고 계시록의 궁극적 승리를 확신하는 신약의 성도인 우리처럼 욥은 과연 위로받을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전한 바울도 세상에 여전히 울고 있는 자들이 남아 있음을 인정했기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