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웅 목사]뒤집혀진 세상에서 존재함(욥 19장-21장)
1. 악인형통론(21장)
욥의 세 친구들은 몰골이 흉측해질 정도로 망가진 욥의 모습을 봤을 때, 일주일 동안이나 말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욥을 제대로 '본다면' 욥의 고난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21:5).
욥은 악인들이 소름돋을 정도로 번영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움 속으로 빠져든다(21:6). 욥은 친구들에게 ‘악인이 오히려 형통하던데!’라고 말한다. 친구들의 단순하고 협소한 신학을 논박하는 것이다.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이기에 악인에게는 욥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과 번성이 담보되지만, 욥과 같이 초특급 경건과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욥은 악인필망론을 긍정했다(17-21절). 악인과 의인이 구별되지 않는 최후(종말)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악인 징벌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재앙의 날이 '당장에는' 없다고 하여 악인들이 안하무인격으로 대담하게 악행을 저지르고 있지만,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악인은 '시차'가 날 뿐 결국에는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악인은 고통, 의인은 번영’이라는 일차원적 방정식은 시편 1편만 아는 것이다. 선과 악, 의와 불의가 도착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의인은 동요하면서도 연단되며 견고해진다.
2. 악인의 번영도 지나가는 법(20장)
소발은 사회경제적으로 불의와 압제를 범한 악인의 행복과 평안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한다(4-11절). 소발은 악인의 번영은 일장춘몽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12-23절).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지만 이런 판단은 욥을 겨냥한 말이었다.
하나님은 악인이 철 병기를 피하려고 할 때 놋화살을 쏘아 그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24절). 마침내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며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다(27절). 처참한 대파국이야말로 악인을 향한 하나님 진노의 결정적인 날(D-Day)인 셈이다(26-29절 소리내어 읽어 보라).
소발은 20:19절을 욥에게 겨누고 단죄하며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욥의 피흘리는 부위에 소금을 뿌리고 있다. 소발은 욥의 항변 자체를 견딜 수 없어한다. 야비하고 잔인한 공격에 몰두한다(욥, 너는 가난한 자를 학대했지? 너가 짓지 않은 집이지? 남의 집을 빼앗은 것 아니야?).
소발은 심지어 없는 죄를 만들어 내는 광기적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를 수호하는 일에만 편집증적으로 광분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뒷전으로 밀게 된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자칫 인간을 혐오하는 또다른 죄를 범할 수 있다(중세 마녀사냥, 독일 나찌즘, 소설 주홍글씨).
3. 나의 고엘(구속자)이 살아계시니(19장)
욥은 터무니없는 논리로 자신을 압박하는 세 친구들의 심문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부한다. “너희는, 이제는 제발 그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폭행이 친구들과 친지 그리고 가족들에게 준 어려움과 그 결과를 언급한다(6-20절). 지인들로부터도 사회적 모멸도 경험한다(13, 19절).
욥은 뼈와 살까지 하나님께 학대를 당하며 신체적 고통을 당한다. 그는 정신적 고립감이나 영적으로 버려짐을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는다. 욥은 단독자적인 모습으로 투쟁하는 고독한 영웅이 되었다.
구약에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과 의로움 앞에 자신의 결핍과 곤경을 말하며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욥은 이런 느낌과는 전혀 딴판으로 자신을 이해하며 존재하려고 한다.
욥은 정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응답도 없는 하나님을 결사적으로 찾는다. '가죽과 살로 버티는 시간'들이 때로는 초조하지만 자신의 고엘(회복자)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