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웅 목사]고난이 넘치는 세상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욥 24:1-25)
1. 극단적으로 불의한 현실(1-12)
불의한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찍어 누르고 있것만 그 어떤 하늘의 개입도 일어나지 않는 억울하고 기막힌 세상이다. 예수의 탄생 때 만삭이 된 산모에게 여관집 주인들은 방을 내주지 않았던 비정한 시간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탐욕에 찌든 유력자들이 고아와 과부의 토지 경계표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옮겨(거짓 증거에 의한 땅 문서 위조) 이웃의 땅을 강탈한다(2-4절). 급전의 높은 고리(高利)를 가혹하게 거두며 최저생활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빼앗는다. 이런 아수라판에는 세상에서 학대받는 자들이 죄다 숨거나 사라진다(4절).
토지와 삶의 터전을 빼앗겨 유랑민이 된 자들은 들나귀처럼 '빈 들'(마음 착한 부자들이 추수할 밭고랑과 이삭들을 남겨 놓은 곳)에서 아사(餓死)와 동사(凍死)의 위기 앞에서 살아간다. 지독한 가난에 휩싸이고 피눈물 나는 궁핍이 조여온다. 남는 것은 인간 존엄 이하로 연명하는 것 뿐이다.
심각한 불평등에 대한 욥의 사실주의적인 묘사는 그가 평소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과 관심의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임무와 역할은 무엇일까? 6-8절이 방치된다면 세상에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부조리한 지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가야 한다.
2.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13-17)
초특급 부자였던 욥이 관찰했던 세상(사회)은 공평과 정의를 추구하는 삶의 도(길)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수인 곳이다.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에 의해 생명과 재산은 빼앗긴다(14절).
간음자들은 광명, 낮, 빛을 피하며 낮을 밤처럼 여기고 탈선과 도착(倒錯)의 방식으로 살지만 죽음의 권세(그늘)에 포박된 채 시달리며 살아간다(15-17절).
욥의 묘사와 증거가 우리(교회)에게 주는 도전과 메시지는 무엇일까? 거꾸로 뒤집힌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런 나쁜(망가진) 세상을 바로잡으라는 말이다.
우리는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을 심각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이 고통의 무게를 아는지 모르는지 즉각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계신 하나님의 '신비한 무능'(슬라보예 지젝)을 절감해야 한다.
욥의 '의미 없는' 고통(고통이 죄 때문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겹쳐서 생각해 봐야한다. 두 사람 모두 어쩌면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무능함을 감지하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충격적인 발견과 각고의 터득이야말로 우리의 맹목적인 믿음 칭송과 하나님에 대한 병든 의존이나 정신 승리적 천국 도피자로의 무책임한 비약과 책임회피를 막아주는 최고의 명약(名藥)이 될 수 있다.
3. 절대로 확실한 진리(18-25)
욥은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는 사악한 자들을 보며 살았지만, 결코 허무주의나 악의 절대적 지배론에 투항하지 않았다. 사악한 자들에게는 스올과 구더기가 대기 중이며(19-20절) 잠깐은 악인에게도 평안과 안락함이 유지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빈틈없이 악행자들을 감찰하고 계신다(24절).
혹시라도 하나님의 악인 심판이 지체되거나 즉각적으로 집행되지 않더라도 시간이 걸린 뿐이지 반드시 끝까지 시행될 것이라고 확신한다(25절).
이토록 예리한 욥의 사회비평적 관찰과 치밀한 증언은 어떻게 배양된 것일까? 욥이 제기한 문제 즉, ‘세상은 공평과 정의의 통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에 대한 욥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세상은 억울한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돌아간다. 죄 없는 자도 고난을 받으며 살 수 있는 불공평한 사회다. 하나님의 '신비한(섭리적인) 불평등 사회' 속에 산다. 이 말은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가혹한 대접을 받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자비와 연민을 창조적으로 발동하여 이들을 도우며 살아야 함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이자 성탄의 도전적인 소식이다. 성탄이 명실상부한 성탄이 되게하는 교회의 책무이며 교회의 존재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