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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웅 목사]자유와 사랑의 역동(변증법)(고전 10:23-11:1)

by 청신아 2023. 11. 8.

1. 사익(私益)이냐 공익(公益)이냐 

'나는 모든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는 말이긴 하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자유이거나 사람을 세우는 자유는 좋고 아름답다. 

우리는 ‘사사화 된 소유적 자유’를 배격한다. 자유가 성경적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면 자기딴엔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자기 중심적 욕망을 드러낸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자유의 슬픈 패착이다.

자유는 양심과 함께 걸을 때 힘차고 존귀하다. 양심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을 담보해 주는 가장 빛나는 햇살이자 강(江)의 발원지와 같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슈가 된 자유 사용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에서 유통된 육류를 감사함으로 사다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둘째, 그러나 교회에 나온 초신자들이 이 고기가 신전 제사에 사용했던 것을 알았는데, 자유의 복음을 알았던 성도들이 아무렇지 않고 먹는 것을 보게 되어 불편함을 느꼈다면, 성숙한 성도들이 고기 먹는 것을 즉시 중지하는 것도 자유라는 것이다.

2. 득인(得人)을 위한 자유

진리의 힘은 아는 만큼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할 자유는 동등함(평등)과 쌍둥이라는 사실이다. 

왕정(王政)을 극복하고 근대 시민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유와 평등이었다. 시민사회는 개인의 존엄성(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예: 신분, 가족, 지주, 왕권) 존귀함이 침해되거나 억압되지 않도록 시민계약(법)을 맺었다.

서구의 근대 자유민주 국가의 성립에는 '모두의 자유'를 위해 '법의 통치'(rule of law)를 모두가 합의했기에 '왕권신수설'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수 있었다.

초대 교회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지닌 존재임을 깨달았다(왕만 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버렸다!). 진리가 주는 깊고 맑은 자유를 서로 누렸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체험으로 터득한 자유를 누렸다. 그는 어떤 사람 앞에서도 결코 눈치 보거나 위축되지 않는다는 확신의 소리를 천명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종이 될 자유를 선택했다(고전 9:19).

3. 찐 필요를 채우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곁으로 내려오며 자기를 비워 배신당할 위험을 감수한다. 그리고 상대방처럼 느끼고 동감하려고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는 것이다(고전 9:27). 

그렇지만 우리는 때때로 너무나 공감하려는 이해심 때문에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며 상처를 받기도 한다. 어쨌든 자기의 이익을 섞지 않으려고 했던 모든 사랑은 영원에 이를 것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려는 교회는 자신을 '과격하게' 희생하며 내어주며 급기야 죽음에 넘겨지기도 한다. 사랑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면, 주변인의 정체성을 갖고 극단적인 환대의 자리로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의 몸으로 우리 곁에 이사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의 결정판, 자유의 극점(極点)인 사랑으로 산 제물이 되셨다. 따라서 극단적 환대가 참 선교이며, 환대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